
벚꽃 지는 밤의 계약
By 송다은
romance · 2026-04-23
이서영은 이태혁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이태혁은 고민 끝에 받아들이지만, 세화 그룹 회장의 반대에 부딪히고 쫓겨난다. 이서영은 이태혁에게 함께 도망치자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1장
벚꽃 지는 밤의 계약
“이태혁 씨, 우리… 계약 결혼해요.”
이서영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태혁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고급 레스토랑의 은은한 조명 아래, 흩날리는 벚꽃잎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재벌 3세도,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는 남자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이서영은 이태혁의 당황한 표정을 예상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태혁 씨에게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필요한 건 오직… 6개월간의 ‘남편’ 역할뿐이에요.”
이태혁은 이서영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국내 굴지의 패션 그룹, ‘세화’ 그룹의 외동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뛰어난 사업 감각까지 갖춘 완벽한 여성. 그런 그녀가 왜 자신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몰래카메라라도 찍고 있는 건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이태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서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깊은 슬픔이 담긴 눈으로 이태혁을 바라봤다. “저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이태혁 씨가 필요해요.”
이서영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태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녀의 집안 사정, 그룹 내의 복잡한 권력 다툼, 그리고 그녀를 억압하려는 정략결혼의 압박까지. 이서영은 자신의 자유를 되찾고, 그룹을 지키기 위해 ‘가짜 남편’이 필요했고, 이태혁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계약 조건은… 생각보다 간단해요. 6개월 동안 저와 부부 행세를 하고, 제 곁을 지켜주세요. 물론,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거예요. 이태혁 씨가 원하는 만큼.” 이서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태혁은 고민에 빠졌다. 계약 결혼이라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로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서영의 간절한 눈빛과, 그녀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평소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큰 도박이 아닐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이태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며칠 후, 이태혁은 이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밤새 고민했고, 결국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이서영에게 계약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이서영은 기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다음 주 월요일에 세화 그룹 본사에서 만나 자세한 계약 조건을 논의하자고 했다. 이태혁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월요일 아침, 이태혁은 긴장된 마음으로 세화 그룹 본사 건물 앞에 섰다. 거대한 유리 건물은 그의 초라한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서 이서영의 이름을 말하자, 직원은 친절하게 VIP 라운지로 안내했다. 라운지 안에는 이서영이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이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냉철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이서영은 이태혁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태혁 씨, 잘 오셨어요. 이쪽은 제 비서실장님이신 김 실장님이세요.” 이서영은 김 실장을 소개했다. 김 실장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 그럼… 계약 조건을 다시 한번 확인해볼까요?” 이서영은 서류가 든 폴더를 이태혁에게 건넸다.
이태혁은 폴더를 열어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복잡한 조항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산 분할, 사생활 보호, 언론 대응… 계약 결혼이라는 허울 아래 감춰진 현실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때, 이태혁의 눈에 이상한 문구가 들어왔다. ‘계약 기간 동안, 이태혁은 이서영의 모든 지시를 따라야 하며, 이를 어길 시 계약은 즉시 파기된다.’ 모든 지시? 이태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이서영을 바라봤다.
“이… 모든 지시라는 건…” 이태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서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태혁에게 속삭였다. “글쎄요… 그건 앞으로 알아가게 되겠죠.”
그 순간, 김 실장이 이태혁에게 다가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류 검토는 끝났습니까?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회장? 이태혁은 당황했다. 계약 결혼에 회장까지 관여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이서영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 실장은 이태혁의 팔을 잡아끌며 회장실로 향했다. 이태혁은 얼떨결에 김 실장을 따라 회장실로 들어갔다. 넓고 화려한 회장실 안에는 늙고 깡마른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이태혁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세화 그룹의 회장, 이서영의 할아버지였다. 회장은 이태혁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이서영이의 가짜 남편이 될 놈이냐?”
이태혁은 긴장한 탓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회장님.”
회장은 갑자기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이태혁의 뺨을 후려쳤다. “건방진 놈! 감히 내 손녀를 속여? 계약 결혼 같은 짓은 절대 용납 못 한다!”
이태혁은 갑작스러운 폭력에 휘청거렸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회장을 바라봤다. 회장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때, 회장실 문이 활짝 열리며 이서영이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이태혁을 감싸 안으며 회장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회장은 이서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서영아, 정신 차려! 저런 놈에게 속지 마! 내가 널 위해서 좋은 상대를 찾아놨다!”
이서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어요! 저는 이태혁 씨와 결혼할 거예요!”
회장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결혼은 절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는 이태혁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당장 여기서 꺼져! 다시는 내 손녀 앞에 나타나지 마!”
그때, 회장실 한쪽 벽면이 열리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이태혁을 에워쌌다. 그들은 이태혁을 강제로 끌어내려고 했다. 이태혁은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남자들에게 붙잡혀 회장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서영은 울면서 이태혁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태혁은 억지로 세화 그룹 본사 건물 밖으로 내쫓겼다. 그는 건물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차갑게 빛나는 세화 그룹의 로고가 보였다. 그는 과연 이 계약 결혼을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그때, 이태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서영’이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이태혁 씨… 괜찮아요?” 이서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이태혁은 힘없이 물었다.
이서영은 잠시 침묵하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태혁 씨, 우리… 도망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