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다시 만난 너

Chapter 3 — 오래된 찻잔 속의 낯선 향기

짙은 붉은색을 띤 노을이 카페 '봄날의 정원'의 통유리창을 물들이고 있었다. 창밖 풍경은 10년 전과 똑같았지만, 내 안의 풍경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윤다연.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라니.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분명 10년 전,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망쳤었다. 우리의 사랑도, 그녀의 꿈도, 내 미래도. 그런데 다시 돌아온 이 순간,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다른 남자의 여자친구가 되어 있었다.

"태혁아!"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따뜻하고 다정한, 그러나 10년 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어딘가 낯선 느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는 훤칠한 키에 단정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윤다연은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기댔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랜 연인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였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숨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녀를, 그리고 그 남자를 더 이상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카페를 벗어나자 밤공기가 차갑게 뺨을 스쳤다. 텅 빈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10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단지 시간뿐, 내가 바꾸고 싶었던 과거는 이미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윤다연은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그녀에게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더욱 먹먹해졌다.

'민지... 아니, 다연아. 넌 왜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그리고 이 남자는 누구지?'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가 10년 전 나와 똑같은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는 사실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태혁아'. 분명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는데, 왜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던 걸까. 혹시 내가 그녀를 잊게 만들기 위해, 혹은 다른 이유로 '민지'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새로운 사랑인 걸까. 아니면, 그저 오랜 친구일 뿐일까.

차가운 밤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대로 망연자실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아니 이번에는 더욱 절박하게 윤다연을 되찾아야 했다. 지난 삶에서 그녀에게 주었던 상처를 씻어내고, 그녀의 곁에서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녘, 나는 낡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좁고 허름한 방이었지만, 이곳이 10년 전 나의 시작점이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에는 10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놓여 있는 낡은 책상이 보였다. 그 위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윤다연과 함께 찍은,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천천히 사진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필름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전해졌다. 그때, 책상 서랍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낡은 나무 서랍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먼지가 쌓인 오래된 찻잔 세트가 들어 있었다. 10년 전, 내가 윤다연에게 선물했던 거였지. 그녀가 찻잔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큰맘 먹고 비싼 돈을 주고 샀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나는 찻잔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옅은 푸른색 바탕에 섬세한 금색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이었다. 10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찻잔 안쪽에는 희미하게 무언가 적혀 있었다. 마치 잉크가 번진 것처럼,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다. 나는 찻잔을 기울여 빛에 비춰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글씨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랑한다, 다연아.'

그것은 나의 다짐이자, 후회였다. 하지만 찻잔 안쪽, 글씨 바로 옆에 희미하게 찍힌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립스틱 자국처럼, 옅은 붉은색으로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양은... 낯선 남자가 잡고 있던 윤다연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작고 붉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10년 전, 내가 쓴 나의 사랑 고백 옆에,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니. 그 붉은색 자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그 순간,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 방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 윤다연인가? 아니면... 그 낯선 남자?

"누구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 대신,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